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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나이 학력 남편 결혼 자녀관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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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孔枝泳, 1963년 1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작가입니다. 학력은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이지요 올해나이는 56세

그녀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판사, 대학원, 번역직 등 여러 일을 하다가 노동운동에 가담하고 1987년 부정 개표 반대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소설작가임을 깨닫게 되고 1988년 구치소에선의 경험을 토대로 쓴 [동트는 새벽]을 



내놓아 창작과 비평에 실리며 등단했습니다. 1994년에는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 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면서 대한민국 최고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였고 '공지영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자전적 성장 소설 [봉순이 언니]가 관심을 끌었고, 7년간의 공백 끝에 사형제 존폐 문제를 다룬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4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성공했습니다. 많은 인세 수익을 얻었으나 이혼 등의 실의와 개인 가치관으로 부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경험담을 승화하여 실제 가족을 모델로 한 [즐거운 나의 집]에선 사생활을 당당히 공개하면서 젊은 여성들에겐 지지를 받아 '닮고 싶은 여성 4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1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고 현재까지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합해 900만부가 팔렸네요. 2009년 출판한 [도가니] 또한 영화로 제작되어 누적 관객 수 460만을 돌파했습니다.



공지영의 결혼과 이혼이야기

그녀는 총 3번의 결혼과 이혼 속 2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위기철[1985년 결혼~ 1991년 이혼], 오병철[1993년 결혼~ 1995년 이혼], 이해영[1997년 결혼~ 2004년 이혼] 등과 결혼하였고 이혼했습니다.

공지영은 운동권 학생으로서 활동하면서도 연애를 하였고 첫사랑과 1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결혼에 대해 공지영의 아버지는 반대했으나 공지영은 "아버지와 같은 부르주아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1번째 이혼 후 쓴 첫 작품인데요, 뉴스에선은 작품보다 공지영의 이혼 소식에 더 집중을 보였습니다.

공지영은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이혼 등의 경험과 특유의 가치관으로 부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세 번째 이혼을 한 이후에 처음으로 저금을 시작했습니다.2003년 공지영은 친구들 30명 정도가 있는 지리산에 내려갔었습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집이 없습니다. 그곳에선 가장 부자인 친구가 연 70만 원을 지불하는 집에선 살고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빚도 없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화전을 부쳐먹기로 해 공지영이 새벽 6시 반에 시작해 약속 시간인 11시쯤에 그 집에 도착해보니 다들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시간 개념이 전혀 없었고 알고보니 집에 시계가 없습니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 친구들은 게으른 배짱이들처럼 여유롭게 지내며 넉넉하지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공지영도 후에 그곳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공지영은 후에 자신이 인생을 실패하고 아무것도 없이 와도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위안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지영은 7년 간의 공백 끝에 복귀하였는데요, 이는 아이들의 학비 등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유력 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기자가 공지영에겐 "국장이 바뀌어서 특집을 하려는데요, '공지영 인터뷰를 하고 와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였고, 




공지영은 자신을 알아봐준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고 있습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 발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 다음 날 신문 가판대에선 신문 1면에 '아이 셋, 이혼 셋'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을 보고 놀라네요. 하지만 공지영은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통쾌하다'라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이혼에 대해 공지영의 아버지는 공지영에겐 "네가 세 번 이혼하는 것은 싫지만, 네가 불행해지는 것은 더 싫다"라며 공지영을 걱정해줬고 



이 말은 용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설가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시기여서 공지영은 실의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소설가 못하면 무슨가, 내 인생이 그것뿐은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위대한 소설가보단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한편, 공지영은 이 기사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비난을 할 것을 우려하였으나, 사람들은 공지영이 아픔을 이기고 나온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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