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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나이 군대, 학력과 키 혈액형에 대한 정보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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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는 배우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가수였고 성우 활동도 한 적이 있습니다. 콧소리 섞인 미성에 성우 출신다운 정확한 발음과 발성이 트레이드마크.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광고 나레이션으로 많이 노출된 탓도 있지만…

1984년 제5회 MBC 강변가요제에 대학 동기들과 같이 '덧마루'라는 그룹을 짜서 '길 잃은 친구에겐'라는 노래를 불러 장려상 입상도 하였습니다. 이후 육군 병으로 입대하여 제27보병사단에선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며 강변가요제 출연 덕분에 분기에 한번씩 문선대 단원으로 차출되었습니다. 

허리부상으로 의병 제대를 하였습니다. 그는 64년생으로 올해 54세로 서울 출신이며

175cm AB형입니다. 슬하에 4명의 자녀가 있는데요

학력은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입니다 : )



원래 배우가 꿈이었으나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습니다고. 1990년 KBS 성우로 입사했습니다. 같은해 1991년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됩니다. 라디오 드라마에선 활동하던 성우 한석규를 기억하는 몇몇 오래된 성우팬들은 그를 ‘소년과 청년 역에 잘어울리는 높고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던 젊은 성우’로 추억하기도 합니다. 1999년 씨네 21과의 인터뷰를 보면, 성우로 입사했을 당시 절친한 선배인 故 장세준 성우가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말에 도전하여 배우의 길을 걸었습니다고 합니다.

김승준 성우가 전속 시절 일화를 말하길[2019년 3월 30일 홍쇼], 정형식 PD가 '사랑으로 크는 나무' 배역에 김승준을 넣을려고 했습니다. 동기인 한석규를 넣었는데요, 굉장히 잘해서 김승준이 놀랐다고 합니다. 한석규는 작품 중에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이 붙고 성우를 그만두고 김승준 성우가 배역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고 합니다.



데뷔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었는데 많은 비중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시즌 1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습니다.

그 후 여명의 눈동자에선 서북청년단 역으로 단역으로 잠깐 모습을 비춘 한석규는 1993년에 역대 최고 시청률 7위 [61.1%]를 기록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선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중 여주인공 김희애에겐 의지가 되는 역할로 많은 관심을 끌었고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게 되면서 성공가도를 다르게기 시작합니다. [원래 이 역할을 문성근이 할 예정이었으나, 연극과 영화 스케쥴로 하차했습니다.]




아들과 딸 직후, 최수종, 채시라와 드라마 파일럿에 섭외, 이 드라마 또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최고 스타로 군림합니다. 파일럿의 대성공 이후 당시 MBC의 가족극이었던 한지붕 세가족의 참석진들이 교체되면서 새로 투입되었고 다음 해 1994년, 학교 선배이자 한때는 최고에 파트너였던 최민식과 드라마 서울의 달에 섭외되어 자체 최고 시청률 48.7%를 기록, 연타석으로 성공하며 자리를 굳힙니다.

그러는 도중 마지막 승부 후속드라마로 편성된 박형준, 이시은의 미니시리즈 '도전'의 시청률이 영 나오지 않자 오연수와 같이 시청률 상승 카드로 중간에 투입됩니다. 요즘 같으면 한석규, 오연수 같은 스타들이 시청률 상승을 위해 중간 투입되는 경우는 없으나, 이 때는 공채 시스템이었고 스타여도 방영국에선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 뒤에는 1994년 SBS의 모래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에 단역중에 단역으로 나왔습니다.당시 한석규처럼 상한가를 쳤던 많은 스타들은 공채 시스템이라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투입됬습니다.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의 질서가 해체되고, 영화계 외부에선 수혈된 새로운 인력들과 대기업과 금융권의 참여로 제작과 유통환경이 개선되면서 대박과 비평 양쪽에선 모두 한국영화가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영화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선 문화산업으로 환골탈태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의 최선두에 대박과 비평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한석규가 있었습니다.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선도 한석규한테 심각한 집중을 보였고, 10여개의 시나리오가 한석규한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맨틱코메디 닥터봉을 영화데뷔작으로 선택한 한석규는 홀아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당시 서울 관객 기준 376,443명을 동원, 그 해 한국영화 관람수 1위를 기록하며 대박에 성공합니다.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메디로 선택한 까닭은 매우 심각한 주제보다 자신에겐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고 합니다. '닥터봉'과 같이 참석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 진희경이 참석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습니다. 데뷔작 '닥터봉'의 성공으로 한석규는 단숨에 충무로 최고에 대박배우로 떠오르면서 무려 40여개의 시나리오가 그에겐 몰리는데요 ㄷㄷ

그 다음해인 1996년, 배우 박성미의 남편인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컴퓨터그래픽 및 특수효과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얘기를 그린 은행나무 침대에 참석하여, 서울 기준 68만 5천명을 동원하며 확실한 관객동원력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넓히게 되지만, 케릭터의 화제성은 다른 배우에겐 모두 빼앗긴, 유일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1997년에는 무려 세 작품에 참석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서울 기준 163,655명], 조폭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블랙 코메디 넘버 3[서울 기준 297,617명],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꽤나 대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접속[서울 기준 674,993명]을 연달아 힛트시켰으며, 느와르[초록물고기], 블랙코메디[넘버 3], 멜로[접속]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케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며 최고에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서울의 달 이후 슬럼프를 겪고있던 학교 선배 최민식과 초록물고기에선 같이 참석하며 관심받기 시작한 송강호를 넘버 3에 참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습니다.


1998년에는 한석규가 참석한 최고에 작품이자 많은 영화 팬들 사이에선도 최고에 멜로작품으로 꼽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참석했습니다.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습니다는 극찬을 받았고, 한석규의 연기력, 자연스럽게 잔잔한 일상을 표현하는 연기력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네이버 영화 홍성진의 영화해설 인용] [서울 기준 422,930명] 참고로 한석규는 이 영화 OST 앨범에 들어가는 주제곡도 직접 불렀습니다.




다음 해인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로 전성기의 정점과 티켓파워의 정점을 찍늡니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원과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등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이 영화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58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 11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선 합을 맞췄던 심은하와 같이 미스터리물인 텔 미썸딩에 참석했습니다. 서울 기준으로 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박은 성공시켰으나 앞뒤가 뚝뚝 끊기는 이야기와 영상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단 석연치 않은 결말이 나름 당대에는 충격적인 반전인지라 결말에 대한 입소문이 좋았습니다.


1995년 닥터 봉을 시작으로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1999년 쉬리와 텔 미 썸딩까지 8편 연속 대대박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한석규

흔히 말하는 '잘 생기지도 못 생기지도 않은' 외모라서 특유의 순한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선량해 보이고 성질 더러운 연기를 할 땐 정말 그렇게 보인다. 스펙트럼이 꽤 넓다고 할 수 있는데요, 요즘 들어 어둡고 지독한 연기를 많이 선보입니다.





자신의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고 가라앉아 있는 성격이라고. 젊을 때는 자신의 그런 성격에 굉장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합니다. 아무래도 날고 기는 끼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연극영화과에선 조용한 성격으로 버텨 내려니 비교도 많이 되었을 듯. 그래서 대박적인 연기를 할 때 나름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약간의 우울증이 있습니다고도 합니다.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정도라는군요


인터뷰를 꺼리고 SNS도 하지 않습니다. 작품 외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철저히 배우로 남고 싶어 하는 듯 싶다. 배우는 행동으로 말해야 하는 직업인데 인터뷰를 하면 말만 번드르하게 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오죽했으면 뿌리깊은 나무 종영 뒤 인터뷰가 쇄도했을 때는 아예 도망다녔다고 인증했습니다. 덕분에 이미지는 굉장히 좋지만 팬 입장에선은 눈물이 날 지경. 영화 내려가면 떡밥 좀 달라고 아우성치는 팬이 부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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